쓰는 것만이 나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곽아람 『쓰는 직업』 마음산책, 2022
"오늘 뭐 하느라 이렇게 바빴지?"
하루가 끝날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매일 출근하기가 무섭게 To-do 리스트를 작성하고 정신없이 지워나가는 데만 집중했기 때문일까? 결국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아직 지우지 못한 To-do 리스트가 몇 개나 남았는지 마음속으로 백 번이나 더 가늠했다. 내일 아침 출근해 하기로하고 집으로 피신한다. 정작 내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엔 소홀한 채로.
1. 일기록 '이란 무엇일까?
일 기록은 하루 동안 내가 한 업무의 기록이다.
조금 더 보편적으로는 '작업 일지', 영미권에서는 ‘Brag Document'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사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일 기록'이라는 단어를 써보려 한다. To-do 리스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지만, 일 기록은 이미 완료한 업무를 되짚어보는 과정이다.
일 기록은 단순한 업무 정리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목표를 재정립하고 업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도구이다. 자신만의 업무 방식을 정립하고 싶거나, 커리어 목표를 분명히 하고 싶은 주니어들에게 이 글이 많이 가닿길 바란다.
2. 일 기록을 시작하는 방법
1) 간단하게 시작하기
- 퇴근하기 전, 하루의 끝에 5분만 시간을 내어 “오늘 내가 한 일”을 적어보자.
- Notion이나 Google Keep을 많이 활용한다.
2) 구조화해보기
처음에는 업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구조화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3) 주기적으로 되짚어보기
매주 또는 매월 기록을 되돌아보며 내가 이룬 성과를 점검해 보자. 이를 통해 스스로의 성장 속도를 확인하고 다음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3. 왜 일 기록이 중요할까?
1) 하루를 마치면 퇴근이 즐겁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는 큰 성취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작은 승리’(Small Win)를 인지하는 것이 개인의 동기와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일 기록은 하루 동안 완료한 업무를 구체적으로 되짚어보며, 작은 성취들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을 완료하거나 동료를 도와서 함께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런 작은 성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그 다음 과제를 수행할 동기가 생기고, 팀 전체의 협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2) 우선순위 설정이 쉬워진다
주니어는 업무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루하루의 기록을 통해 내가 어떤 업무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어떤 일이 가장 긴급했는지를 돌아보면서 업무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업무가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했음을 기록에서 확인한다면, 비슷한 유형의 업무를 다시 맡았을 때에는 적절히 배분할 수도 있고, 팀원들과 협업을 통해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기록은 이렇게 업무의 패턴을 분석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데 유용하다.
3) 성과평가와 승진 준비에 유리하다
성과평가 시즌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1년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더라?"하고 막막해지곤 한다. 하지만 꾸준히 기록을 남겼다면, 내 업무의 성과와 기여도를 쉽게 정리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만족감에서 끝나지 않고 리더나 조직에 나의 성과를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주니어 시절에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이때 기록해둔 내용을 바탕으로 면담을 준비한다면, 단순히 "열심히 했다"가 아닌 "이 프로젝트에서 이런 성과를 이뤘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4) 주간 회고가 수월해진다
회고 활동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메타인지 활동이다. 주간 회고를 할 때 좋았던 점들에 대해 질문하며 그 이유와 지속 방법을 고민하거나 더 나은 방식을 탐색할 수 있다. 또한 아쉬웠던 점들을 돌아보며 "뭐가 아쉬웠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와 같은 자문을 통해 스스로 개선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부족함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회고의 기본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4. 주니어가 알아야 할 일 기록의 진짜 효과
주니어라면, 반복적인 운영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커리어 초기부터 일의 결과와 과정을 남기고 이를 공유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습관으로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반복적인 운영 업무라 하더라도, 미세한 차이를 인식하고 기록하며 개선 작업에 반영하다 보면 나만의 ‘섬세한 감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각은 이후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나침반처럼 작동하게 됩니다. 치열한 반복 업무와 고민이 없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을 감각이기에 더욱 귀하죠. 반복을 피할 수 없다면, 차이를 만드는 기회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백종화, 강정욱, 『나의 첫 커리어 브랜딩』, 플랜비디자인, 2023
우리는 초조하게 뭔가를 계속 해야 한다고 느낄 때, 번아웃을 경험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작고 깔끔한 To-do 리스트, 생산성을 무제한으로 증폭시켜준다는 툴, 야근러들을 위해 무제한으로 제공된다는 간식, 집에 가는 동안 눈 붙이게 해준다는 택시비와 퇴근 시간을 당겨준다는 여러가지 팁, 그런 팁들을 읽지도 않은 채 저장해둔 북마크 100개, 죄책감, 뭔가 부족하다는 감각, 그러니까 돌려보는 수많은 릴스, 기절해서 잠들기. 그런 것들이 나를 구해줄 수는 없다.
오히려 피부 위에 얇게 앉은 물기처럼 은은하게 내 온기를 빼앗아 가고 있을 뿐. 오늘의 일에 마침표를 찍고, 나를 잘 다독이며, 내가 나를 구해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법은 기록. 그리고 기록하기. 그 뿐이다.
<참고 도서&자료> 곽아람, 『쓰는 직업』, 마음산책, 2022 게르겔리 오로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가이드북』, 한빛미디어, 2024 백종화, 강정욱, 『나의 첫 커리어 브랜딩』, 플랜비디자인, 2023 신지혜, 황효진, 『뉴그라운드가 말하는 "일 기록"이 뭔가요?』, 뉴그라운드 저널, 2021 한기용, 『실패는 나침반이다』, EO스튜디오, 2024 Harvard Business Review, 『The Power of Small Wins』, 2011 The Fountain Institute, 『Brag Documents: Track Your Work for Career Growth』 Forge, 『Move Tasks from Your To-Do List to an I-Did List』 Julia Evans, 『Brag Documents: A Simple System for Tracking Your Accomplishmen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