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국제뉴스) 유지현 기자 =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꼽히는 크로아티아어. 그 속에는 효율과 생산성만 추구해온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치가 담겨 있다. '목적 없이 배회하기', '무의미한 수다', '자연 탓하기'를 뜻하는 단어들이 일상 언어로 자리 잡은 크로아티아 문화를 들여다본다.
크로아티아는 니콜라 테슬라를 배출한 과학 강국이다. 낙하산 원리를 최초로 설계한 파우스트 브란치치, 만년필과 기계식 연필을 발명한 슬라볼류브 펜칼라, 현대 어뢰의 기초를 만든 이반 블라조 루퍼티나가 모두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이런 혁신적 성취를 이룬 나라에서 '클라프라티(klafrati, 무의미한 수다)', '바울야티(bauljati, 목적 없이 배회하기)', '유지나(južina, 날씨 탓하기)' 같은 단어가 일상어로 쓰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주로 슬로우 라이프를 긍정하는 단어들이다.
언어인류학 창시자 에드워드 사피어는 "언어는 문화를 반영할 뿐 아니라 화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크로아티아어의 독특한 단어들은 바로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명확한 목표와 집중력이 창조성의 기반이지만, 동시에 여유와 균형 속에서 창조적 사고가 자란다는 믿음이다.
크로아티아어는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국무부 산하 외교연구원(FSI)에 따르면 영어권 사람이 크로아티아어로 일상 회화를 하려면 약 1100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크로아티아어 명사는 여성, 남성, 중성 세 가지 성으로 나뉘며, 각각 일곱 가지 격으로 변한다. 단어 하나가 상황에 따라 스무 가지가 넘는 형태로 바뀐다.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도 성과 격에 맞춰 변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 복잡한 문법 구조에는 발칸반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슬라브어 뿌리 위에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영향이 쌓였다. 이렇게 복잡한 격변화 체계가 담긴 크로아티아어는 화자 간의 관계, 사물에 대한 태도, 행위의 방향성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어 매력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어 '클라프라티(klafrati)'는 별것 아닌 주제로 끝없이 수다를 떠는 행위를 의미한다. 주로 자그레브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서 쓴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카페에 앉아 친구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것, 바로 '클라프란예(klafranje)'이다.
현대 사회는 모든 대화에 목적과 효율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아무 목적 없이 모여 앉아 하찮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인간관계의 윤활유이자 삶의 여유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본다.
'유지나(južina)'는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강타하는 바람이다. 국제적으로는 시로코(Sirocco)로 불리는 이 남동풍은 사하라 사막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가로질러 크로아티아에 도달한다. 따뜻하고 습한 이 바람은 두통, 무기력감, 집중력 저하, 우울감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13~19세기 중세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절, 유지나가 부는 동안에는 중요한 법률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범죄자들도 재판에서 유지나를 감형 사유로 내세울 수 있었다.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유지나가 불었다'고 주장하면 형량이 줄어들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유지나를 핑계로 삼는다. 기분이 나쁘거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유지나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파카트(fakat)'는 '정말', '진짜'를 의미하는 크로아티아 속어로, 터키어 '하키카트(hakikat, 진실·현실)'에서 유래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발칸 반도의 역사적 흔적이 언어에 남은 것이다.
특히 자그레브와 크로아티아 북부 지역에서 널리 쓰는 이 단어는 외국인들에게 처음에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다. 영어 욕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파카트 굴라단(Fakat gladan, 진짜 배고파)", "파카트 예 돕로(Fakat je dobro, 정말 좋아)"처럼 문장 어디에나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질문으로도 쓴다. "파카트?(Fakat?, 정말?)"라고 물으면 상대방이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한국어에도 "진짜?"라는 추임새가 자주 등장한다.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이 표현을 신기해하며 밈(meme)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면, 언어마다 공감을 표현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크로아티아어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표현 중 하나가 '카코 다 네(kako da ne)'이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어떻게 예 아니"라는 뜻이 되어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는 두 가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맥락과 억양에 따라 "물론이지"가 될 수도 있고, "말도 안 돼"라는 비꼼이 될 수도 있다.
진심으로 동의할 때는 밝은 톤으로 "카코 다 네, 카코 다 네!"라고 두 번 반복한다. 반면 냉소적이거나 짜증 섞인 톤으로 한 번만 "카코 다 네..."라고 중얼거리면, 이는 명백한 거부 신호이다.
직접적인 거절이나 대립을 피하면서도, 톤과 표정, 반복 여부 등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 진짜 의도를 전달한다. 이는 고맥락 문화(high-context culture)의 특징으로, 말의 표면적 의미보다 상황과 관계, 뉘앙스가 더 중요한 소통 방식이다.
'샬테루샤(šalteruša)'는 '샬테르(šalter, 카운터)'와 여성 접미사 '-uša'가 결합된 단어로, 관공서나 공공기관의 카운터에서 일하는 여성 공무원을 뜻한다. 서류가 충분한지, 도장이 제대로 찍혔는지 등을 판단하는 '운명의 심판자'를 일컿는 직함이상의 단어다.
크로아티아의 관료주의는 악명 높다. 사회주의 시절의 유산과 복잡한 행정 체계가 결합되어, 간단한 서류 하나를 처리하는 데도 여러 부서를 오가며 수많은 도장을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직급은 낮아도 샬테루샤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러한 관료주의에 불평하면서도 나름의 대처 방식을 갖고 있다. 샬테루샤에게 친절하게 인사하고, 과자나 초콜릿을 건네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샬테르에 갈 때는 하루 종일 시간이 걸릴 것을 미리 각오하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서두르거나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야티(bauljati)'는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피곤하거나, 생각에 잠겨 있거나, 혹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마치 좀비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한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항상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모든 활동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어의 바울야티는 이러한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한다.
크로아티아관광청 마르코 유르치치(Marko Jurčić) 한국 지사장은 "한국에서 가장 아쉬운 건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분초를 다투며 살게 되지만, 크로아티아에서는 몇 시간이고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고, 목적 없이 골목을 걷는 것이 일상이다"라며,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는 철학이 우리 문화에 깔려 있다"라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어의 이 단어들은 단순한 어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클라프라티는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의 가치를, 유지나는 자연과 환경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파카트는 형식보다 진심을 중시하는 태도를, 카코 다 네는 맥락의 중요성을, 바울야티는 여유와 휴식의 필요성을 가르쳐준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언어와 문화는 우리에게 다른 삶의 태도와 가치를 제안한다. 때로는 속도를 늦추고, 때로는 방향을 잃어도 괜찮으며,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수다가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