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과 생성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풍경, 정서인 개인전 서문

[ 국제뉴스 ] / 기사승인 : 2025-12-21 01:49:37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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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국제뉴스) 이운길기자 = 불은 언제나 두 얼굴을 지닌 재료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파괴의 힘인 동시에 새로운 형상을 드러내는 창조의 순간을 품고 있다.

정서인의 작업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이다.

작가의 손끝에서 태워진 한지 조각들은 사라짐의 흔적이자 그 흔적들이 모여 또 다른 풍경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

이번 전시는 '사라짐과 생성 사이의 경계'에 서서 작가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조형적 사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제시한다.

▲정서인 작가 전시 포스터 <갤러리위 제공>
▲정서인 작가 전시 포스터 <갤러리위 제공>

정서인의 작업에서 종이를 태우는 행위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에 머물지 않는다. 태움은 자연을 이해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만의 언어다.

한지는 불과 만나며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찢어지고 휘어지고 각기 다른 깊이의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이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치밀한 조합과 중첩을 통해 화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멀리서 보면 산과 물, 섬과 빛을 떠올리게 하는 추상적 풍경이 드러나고 가까이 다가가면 불이 남긴 미세한 흔적과 층위가 촘촘히 얽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체와 세부가 서로를 완성하는 구조는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이번 전시는 평면 작업을 넘어 입체와 설치 작업을 함께 선보이며 '태움'이라는 조형 언어가 공간으로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숯, 태운 종이, PVC 인쇄, LED 센서등 등 서로 다른 재료들은 단순한 매체의 확장이 아니라 태움의 개념을 시간과 빛, 감각의 차원에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특히 설치 작업은 관객의 움직임과 시선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풍경을 만들어내며 자연이 고정된 대상이 아닌 유동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정서인 작가 바다를 닮은산 <갤러리위 제공>
▲정서인 작가 바다를 닮은산 <갤러리위 제공>

정서인은 자연을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자연의 '상태'를 번역하는 작가다. 생성과 소멸, 확장과 수축, 남음과 사라짐이라는 자연의 순환 리듬은 한지와 불이라는 재료를 통해 압축되고 시각화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기억이 형성되는 구조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전시는 거대한 메시지를 선언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미세하게 타오른 흔적들, 조용히 연결된 조각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의 흐름 속에서 관객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풍경을 마주하도록 초대한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사라짐을 애도하기보다, 그 자리에 새롭게 형성되는 질서를 목격하게 된다. 이 순간,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자연의 순환과 생명력은 화면을 넘어 '경험되는 풍경'으로 확장된다.

정서인의 작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사라져간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는 그 질문에 대한 시각적 실험이자, 자연과 인간, 기억과 풍경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조용한 제안이다.

▲떠있는섬들 <갤러리위 제공>
▲정서인 작가 떠있는섬들 <갤러리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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