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굳이 대접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 서울경제 ] / 기사승인 : 2021-03-05 17:28:30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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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굳이 대접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정여울 작가


몇 년 전 무인카페에서 문득 예상을 뛰어넘는 편안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무인카페라면 당연히 불편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특별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그토록 편안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간단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최소한의 장비들을 갖춰 놓고, 찻값도 손님이 알아서 내도록 유도한 곳이었다. 찻값은 평균 2,000원 정도. 주인은 하루에 두 번만 들렀다. CCTV도 없다. 하지만 잘 운영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시골이라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많은 돈을 벌길 바라지 않는 소박한 주인과 많은 대접을 바라지 않는 손님들 사이에 뜻밖의 공감대가 있었다. 서로 만나지 않아도 따스한 공감대가 생길 수 있다니.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뜻밖의 수요와 공급의 일치점이었다.


아무도 특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설명서대로 따르고 양심의 소리에 따라 돈을 내기만 하면 그 누구의 감정 노동도 필요 없이 향기로운 차 한 잔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히려 사람이 없기에 아무 말 할 필요가 없어서,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이 느껴졌다. 이런 무인카페가 도시에서도 보편적으로 가능해진다면, 많은 카페 주인들이 필요 이상의 감정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진상 손님’의 불합리한 요구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주인은 카페의 기본 재료들만 잘 챙겨 놓고 하루 종일 자신의 또 다른 행복을 찾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과도한 노동과 필요 이상의 서비스로부터 자유로워진 후의 평화로움, 그 고요함이 문득 포근한 이불처럼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정여울의 언어정담] 굳이 대접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런 무인카페가 대중화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무인카페는 나에게 ‘대접받지 않는 편안함’에 대해, ‘대접하지 않는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편안하고 친절한 서비스에 길들여져 있지만, 서비스가 없는 곳이 서로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절한 서비스에 길들여지면 친절한 서비스가 없는 곳에서 과도한 억울함이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서비스용 친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습된 습관일 뿐, 모든 문화권에서 우대하는 가치는 아니다. 어디서나 매끄럽고 친절한 서비스, ‘입안의 혀처럼’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는 서비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환대는 서비스를 위한 친절도 아니고, 돈을 받기 위한 계산된 친절도 아니다. 친절을 넘어선 환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일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오래 전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는 ‘쪽지 한 장’이 마음 깊은 곳의 친절을 표현할 수 있음을 배웠다. 로비에 커피와 핫초코를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와 우유, 초콜릿 가루를 준비하고, 그 곁에 크로아상도 놔두었다. 쪽지에는 ‘투숙객 모두에게 무료’이며 마음껏 즐기라는 내용이 있었다. ‘다이어트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마음껏 달콤한 디저트의 천국을 경험하라’는 문장이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다. 여행자들은 온갖 피로와 배고픔이 절정에 달했을 때 숙소를 찾기 마련인데, 그런 여행자들의 노고를 생각해 따스한 마음이 담긴 간식과 메모를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듬뿍 느껴졌다. 친절은 꼭 무조건적인 미소와 과도한 존댓말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이렇게 메모 한 장 만으로도 따스한 배려를 느낄 수 있으니.


“친절하세요. 당신이 만나는 사람은 모두 격심한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철학자 플라톤의 메시지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의 모습이 아닐까. 내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내게 아무 말 하지 않을지라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격심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 그의 ‘어디선가 대접받고 싶은 마음’을 향해 친절이라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상처 입은 마음을 알아보고 그의 존재 자체에 진심 어린 환대의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진정한 친절의 유토피아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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