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주의 PBA 시선] "기회는 반드시 온다"… '강민구-조재호가 써 내려간 '100분의 누아르'

[ 국제뉴스 ] / 기사승인 : 2025-12-06 09:46:2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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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국제뉴스) 이정주 기자 = 5일 밤, 하림 PBA 챔피언십 16강전 마지막턴이 진행된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 적막이 흐르는 테이블 위에서 두 남자의 운명이 롤러코스터처럼 뒤엉켰다. '슈퍼맨' 조재호(NH농협카드)와 '뱅크샷의 달인' 강민구(우리금융캐피탈). 이들이 16강전에서 보여준 120분간의 혈투는 단순히 당구 경기가 아니었다. "승부의 흐름은 얄궂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비정한 승부의 세계의 진리를 증명하는 한 편의 누아르였다.

'뱅크샷의 달인' 강민구(우리금융캐피탈)/@PBA
'뱅크샷의 달인' 강민구(우리금융캐피탈)/@PBA
'슈퍼맨' 조재호(NH농협카드)/@PBA
'슈퍼맨' 조재호(NH농협카드)/@PBA

# 데칼코마니... "9점을 치고도 울고 웃다"

승부의 신은 잔인하리만치 짓궂었다. 1, 2세트에서 각각 하이런 6점, 10점을 터트리며 조재호를 몰아 붙였던 강민구. 3세트 1이닝, 또다시 그의 큐가 불을 뿜으며 하이런 9점을 폭발시켰다. 9-0. 누가 봐도 강민구의 낙승이 예상된 순간, 거짓말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5이닝부터 9이닝까지 강민구의 득점이 '0'에 묶인 것이다.

그 틈을 놓칠 '슈퍼맨'이 아니었다. 조재호는 6이닝째 하이런 7점을 몰아치며 11:10으로 턱밑까지 쫓아오더니, 9이닝 4점, 10이닝 1점을 더해 기어코 15:11로 경기를 뒤집었다. "9점을 먼저 깔고 가도 질 수 있다"는 당구의 무서운 불확실성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반전은 4세트에 곧바로 찾아왔다. 이번엔 조재호가 8이닝째 끝내기 하이런 9점을 몰아치며 15:4로 압승했다. 강민구가 3세트에 9점을 치고 졌지만, 조재호는 4세트에 9점을 치고 이겼다. 세트스코어 2-2. 흐름은 완벽하게 조재호에게 넘어간 듯했다. 0-2의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슈퍼맨'의 기세에 강민구의 멘탈은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였다.

# 리셋(Reset) "테이블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운명의 5세트, 11점 단판 승부. 여기서 우리는 스포츠가 주는 위대한 교훈을 목격했다. '테이블은 4세트의 악몽도, 9점의 환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세트 소나기 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였을 강민구는 5세트 1이닝 공타 이후 마음을 빠르게 '리셋'했다. 승부처는 5이닝이었다. 5:3, 불안한 리드 상황에서 강민구는 자신의 주무기인 뱅크샷을 보란 듯이 꽂아 넣으며 7:3으로 달아났다. "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강민구의 포효였다.

조재호 역시 끝까지 저항했다. 3-8로 뒤진 8이닝, 마지막 집중력을 짜내 3점을 추가하며 6-8까지 따라붙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후공에 나선 강민구는 남은 3점을 침착하게 쓸어 담으며 11:6, 길고 길었던 혈투에 마침표를 찍었다.(15:8, 15:2, 11:15, 4:15, 11:6 강민구 3:2승)

강민구-조재호 16강전 경기 통계(15:8, 15:2, 11:15, 4:15, 11:6 강민구 3:2승)/@PBA

# "기회는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결국 경기는 강민구의 승리로 끝났다. 조재호는 0-9의 열세를 뒤집는 기적을 보여줬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강민구는 다 잡았던 3세트를 놓치고 4세트에 무너졌지만, 가장 중요한 5세트에서 다시 일어섰다.

이날 경기는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승부의 흐름은 파도와 같아서, 영원히 내 편일 수도, 영원히 적일 수도 없다는 것. 조재호가 보여준 불굴의 추격전도, 강민구가 보여준 놀라운 회복탄력성(Resilience)도 모두 '찾아올 기회'를 위해 끊임없이 칼을 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3세트의 9점 하이런이 패배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5세트의 뱅크샷 한 방이 승리의 열쇠가 되기도 하는 예측불허의 세계. 어젯밤 조재호와 강민구는 온몸으로 증명했다. 지고 있어도 끝난 것이 아니며, 이기고 있어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처절하게 버티며 준비한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온다는 진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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