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허정진 ‘돌담, 쉼표를 찍다’

[ 대구일보 ] / 기사승인 : 2021-10-11 12:02:04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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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진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쫓아 저마다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 같다.

흑백사진처럼 아무런 동요나 주장이 없을 것 같은 무채색 돌담 위로 드문드문 뜰 안의 나무들이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그 돌담 틈새 사이로 하루를 탁발하는 달팽이가 둥글게 몸을 말아 먼 시간을 끌어당긴다. 발맘발맘 엄마 등에 업혀 동네 마실 가던 길, 새척지근한 속살 내음 귀뺨으로 핥았던 어머니 따뜻한 등이 그립다.

담장 앞에 정물처럼 한 노인이 앉아있다. 바닥에 납작 웅크린, 소 눈망울같이 순한 자기 집을 꼭 빼닮았다. 주름진 손등이 꼼지락거릴 때마다 이 마을의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역사책 같다. 천천히 가야 보인다고, 느린 것이 멀리 가는 힘이라고, 쉬운 것이 오래 가는 법이라고 불립문자처럼 사투리로 삶을 일러줄 것 같다.

햇살이 눈부셨지만 시간이 멈춘 듯하다. 침묵과 정적으로 길게 늘어진 돌담길을 새뜻한 바람 한 줄기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모퉁이를 돌아 나온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한 번쯤 여기 담벼락에 쉬었다가 다시 제 갈 길로 가는 듯하다. 모든 생명과 에너지, 그리고 시인의 영혼도 이 바람이 키웠을 것이다.

예천의 금당실 마을이다. 금당길, 배나무길, 구장터길, 나무지게길, 은행나무길, 고택길, 고인돌길 등 이름도 예쁜 이정표가 수백 년의 고택을 끌어안고 있다. 돌담과 토담이 서로 이웃하며 나지막한 자세로 저마다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 곳에나 시선을 돌려도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휴식 같은 존재가 바로 이곳이다.

사대부 집안의 육면체 사괴석 담장도 있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고 사모관처럼 기와로 지붕을 얹은 토석담도 있다. 이엉을 용마루로 얹어놓은 토담은 마치 꿈틀거리며 비를 몰고 오는 용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막사발 민초들처럼 그냥 둥글둥글한 막돌을 주워다 쌓은 강담을 보면 마음도, 세상도 덩달아 둥글어지는 것 같아 정이 간다.

둥근 것들은 순하다. 벽돌처럼 각을 세워 모서리를 만들지도 않고, 콘크리트처럼 바람 한 줄기 샐 틈도 없는 장벽이 되지도 않는다. 그 구멍 숭숭한 틈새 사이로 바람이 들랑거리고, 애벌레는 둥지를 만들고, 소나기를 피해서 찾아든 나비의 처마가 된다. 그 틈이 있어 세상은 따뜻해지고 구석까지도 햇살이 환하게 들어올 수 있다. 경계이면서도 경계가 아닌 창호지 같은 돌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청유형의 완곡어법일 것 같다.

돌담에 귀를 대면 또랑또랑한 새벽 계곡물 소리, 초저녁별들의 반짝이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각기 다른 모양들이 짝을 이루어 구성된 돌담. 서로 잡아주고, 받쳐주고, 어깨를 맞대어야 태풍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을 그들은 안다. 접착제 하나 없이도 비바람에 흔들림 없는 천년 돌담이 되기 위해서는 돌을 쌓는 하나하나에 정성과 기도밖에 없었겠다.

사람들이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커지면서 점점 담이 높아지고 견고해졌다.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구불구불했던 길도 반듯하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크고, 곧고, 각지고, 단단한 부피를 가진 것들을 앞세워 낡고 오래된 돌담은 자꾸 허물어 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그만큼 높아져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마음도 드러내지 않는다. 시멘트 회반죽으로 바늘구멍 하나 없는 담장은 더 이상 바람도, 나비도 찾지 않고 둥근 보름달은 자꾸 도망만 다닌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사회는 시간이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고, 어떻게든 이겨야 하고, 무엇이든 뺏어와야만 하는 경쟁 시대에는 속도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낮은 것은 들키기 쉽고, 울퉁불퉁한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좁은 것은 불편하고 오래된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시간을 아껴 저축이라도 해두는 것처럼 ‘오늘’을 허둥대며 살고 있다.

부수는 것이 선(善)이라도 된 양 무조건 새로운 것만을 쫓아가는 세상에 금당실 마을은 그런 점에서 특별난 곳이다. 이곳에 오래된 돌담길은 어쩌면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 하나의 작업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오래된 것과 새것, 비싼 것과 싼 것, 편리와 불편, 중심과 가장자리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둥글고 순하게 보는 눈을 가질 때 진정 내가 귀해지고 소중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곳에서는 빠르게 걷는 사람이 없다. 간혹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보이지만 그들 나이에는 뜀박질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여유로운 일이다. 돌담길은 느림이다. 눈과 귀를 열어두고 천천히 걸어야만 보인다. 돌담길에 느낌표로 머물고 있으니 그 속에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그리워하는 것, 바쁘게 사느라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숨겨져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껴둔 비점을 찍듯 돌담에 손을 얹어본다. 과거를 입고 현재를 거닐 듯 돌담길이 지난 시간을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는 내가 보이고, 숨 가쁘게 살아가는 내 일상에 잠시 여유라는 쉼표를 툭! 찍는다.

*금당실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표지판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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