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시는 볼리비아 포토시주에 있는 도시 역사지구유적이다. 16세기 남아메리카 최대 산업다지였으면 198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 도시인 이곳은 1545년, 스페인에 점령당한 이후 200년이 넘도록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다. 기록에 따르면 1556년부터 1783년까지 해마다 45,000톤의 은이 노새와 라마에 실려 파나마시티를 경유,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포토시 은광은 올해로 467년째 은을 채굴해 오고 있다. 그 사이 광산은 수백 미터가 낮아졌다.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해 끌려온 수십 만에 이르는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3만여명에 흑인 노예들이 은광에서 고된 강제 노동과 폭발사고 수은 중독으로 목숨을 읽어갖다
전설에 따르면 1462년, 잉카 제국의 한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이 산을 헤매다 은광을 발견했다. 그가 은을 캐내려 했을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드리지 말라. 이것은 너희 것이 아니라 뒤에 올 이들의 것이니라.”라는. 잉카의 왕에게 ‘포토시(굉음, 즉 목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는데, 그것이 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100년 후,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잉카인들이 황금을 바치며 그들을 맞았던 건 바로 이 전설을 믿고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의 고도는 4,060m 은광의 고도는 4820m 나는 지금부터 은광을 탐험할 것이다.고개를 들수 없는 높이의 광산 고개를 숙인채 15분 쯤 들어 갖을까 고산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채 광산 동골 속으로 올라가다 순간나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밀려와 꼼짝도 할수 없던 순간 광산 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모두를 안정 시키려 애쓰는 모습이 역역하다. 잠시 쉬고 안전모도 점검한다 안전모 위에 있는 렌턴 잠시 끄라고 한다. 일행이 랜턴을 껐다. 순식간에 암흑이 밀려들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란 이런 거 였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암흑이 동반한 공포가 조금씩 커져갈 무렵, 누군가 참지 못하고 랜턴의 스위치를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랜턴이 켜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껏해야 몇 십 초 여을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잠시나마 나를 들아볼수 있었다.그리고 나는 어느새 마음이 평온 해져 있어다. 그리고 다시 광산의 좁은 터널속으로 탐험을 시작 했다. 조금 가고 있을 무렵 반대쪽에서 광물을 실은 수래가 오고 있었다.
광물이 실린 수레를 미는 광부들 중에는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있었다. 이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10대의 청소년었들이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면 한 달에 6-700볼리비아노(십만 원)를 겨우 받지만 광산에서 일을 하면 세 배 이상 벌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광부가 된 이 소년들은 20-30년의 세월을 갱도에서 보내기도 한다.
이곳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겨우 넘는다. 고산에 부족한 산소와 광산에 분진가루 고된노동 등이 원인이라고 알려졌다. 더 오래 살아남는 이들은 남은 생을 진폐증과 싸워야 한다. 정부의 무관심 역시 그들을 서럽게 만든다.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마저 광부들의 권익에는 무관심 하다고 그들은 토로한다. 1825년에 볼리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이 광산은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협동조합 소유가 됐다. 하지만 광부들의 고단한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목숨을 담보로 일해야 하는 원시적인 작업 환경도 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사고가 끊이지 않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다 앞으로 100년은 더 채굴이 가능하다는 세로 리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걸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떨려온다.빈약한 선물을 들고 와 그들의 삶을 엿보는 미안함을 토로하니 가이드는 이렇게 답했다. "이곳 광부들은 관광객을 환영해요. 이 깊은 곳까지 그들을 찾아와 주는 유일한 사람들 이니까요" 광산 투어 자체가 25년 전 광부들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갱도 안에서 일 하는 그들에게는 정말 관광객도 반가운 존재인 걸까. 비좁은 갱도에서 우리들과 마주칠 때면 검은 얼굴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광부들. 이 도시에 사는 20만 명 중에 이제 광부는 12,000명에 불과하다.
광산투어는 40도 가까운 갱도에서 머물다가 얼음이 언 영하의 갱도를 거쳐 끝이 났다. 1651년에 만들어졌다는 터널을 걸어 광산을 빠져나왔다. 10층까지 있다는 갱도에서 겨우 5번째 갱도까지 내려갔을 뿐인데, 나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뚸고 숨이차고 머리가 아픈데, 매일을, 몇 년을, 몇 십 년을 아침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웠다. 암흑의 먼지구멍 속에서 일하는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코카 잎과 음료수를 건네며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수가 없다.
광산에서 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렀다. 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코카 잎을 씹으며 지나가는 남자들 사이를 걸어 포토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종탑에 오르니 눈앞에 세로 리코가 서 있다.
그리고 골목마다 우뚝 솟은 교회의 종탑들이 보였다. 종탑 사이로 포토시 건물들과 포토시 사람들이 정겹다.
포토시의 광산 탐험은 내가 경험한 모든 탐험 중에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아픈 탐험이었다. 화려하게 꽃 핀 유럽의 문화는 결국 이들의 땀과 눈물, 목숨을 담보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된 강제 노동과 폭발사고, 수은 중독으로 수십만 명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의 땅.
그것도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3만 명의 흑인들이 조폐국에서 인간 노새로 일을 해야 했던 곳. 포토시는 슬프고 아픈 기억을 간직한 도시였다.
매일 매일을 죽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며 목숨을 지켜가는 강인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포토시 내 기억속에 아주 오래동안 기억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픈이 아름답게 보상받는 날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