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사를 간직한 도시 포토시

[ 국제뉴스 ] / 기사승인 : 2024-09-22 08:34:01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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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유용준 기자 = 슬픈 역사를 품은 은광의도시 포토시

포토시는 볼리비아 포토시주에 있는 도시 역사지구유적이다. 16세기 남아메리카 최대 산업다지였으면 198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포토시의 세계최대 은광/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의 세계최대 은광/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 도시인 이곳은 1545년, 스페인에 점령당한 이후 200년이 넘도록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다. 기록에 따르면 1556년부터 1783년까지 해마다 45,000톤의 은이 노새와 라마에 실려 파나마시티를 경유,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포토시 /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은광은 올해로 467년째 은을 채굴해 오고 있다. 그 사이 광산은 수백 미터가 낮아졌다.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해 끌려온 수십 만에 이르는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3만여명에 흑인 노예들이 은광에서 고된 강제 노동과 폭발사고 수은 중독으로 목숨을 읽어갖다

▲은광의 광부들 / 사진=유용준 기자
▲은광의 광부들 / 사진=유용준 기자

전설에 따르면 1462년, 잉카 제국의 한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이 산을 헤매다 은광을 발견했다. 그가 은을 캐내려 했을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드리지 말라. 이것은 너희 것이 아니라 뒤에 올 이들의 것이니라.”라는. 잉카의 왕에게 ‘포토시(굉음, 즉 목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는데, 그것이 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100년 후,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잉카인들이 황금을 바치며 그들을 맞았던 건 바로 이 전설을 믿고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포토시 /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 사진=유용준 기자

도시의 고도는 4,060m 은광의 고도는 4820m 나는 지금부터 은광을 탐험할 것이다.고개를 들수 없는 높이의 광산 고개를 숙인채 15분 쯤 들어 갖을까 고산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채 광산 동골 속으로 올라가다 순간나는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밀려와 꼼짝도 할수 없던 순간 광산 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모두를 안정 시키려 애쓰는 모습이 역역하다. 잠시 쉬고 안전모도 점검한다 안전모 위에 있는 렌턴 잠시 끄라고 한다. 일행이 랜턴을 껐다. 순식간에 암흑이 밀려들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란 이런 거 였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암흑이 동반한 공포가 조금씩 커져갈 무렵, 누군가 참지 못하고 랜턴의 스위치를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랜턴이 켜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은광탐험 사진=유용준 기자
▲은광탐험 사진=유용준 기자

기껏해야 몇 십 초 여을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잠시나마 나를 들아볼수 있었다.그리고 나는 어느새 마음이 평온 해져 있어다. 그리고 다시 광산의 좁은 터널속으로 탐험을 시작 했다. 조금 가고 있을 무렵 반대쪽에서 광물을 실은 수래가 오고 있었다.

▲광부들의 모습 / 사진=유용준 기자
▲광부들의 모습 / 사진=유용준 기자

광물이 실린 수레를 미는 광부들 중에는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있었다. 이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10대의 청소년었들이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면 한 달에 6-700볼리비아노(십만 원)를 겨우 받지만 광산에서 일을 하면 세 배 이상 벌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광부가 된 이 소년들은 20-30년의 세월을 갱도에서 보내기도 한다.

▲광부들의 모습사진=유용준 기자
▲광부들의 모습사진=유용준 기자

이곳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겨우 넘는다. 고산에 부족한 산소와 광산에 분진가루 고된노동 등이 원인이라고 알려졌다. 더 오래 살아남는 이들은 남은 생을 진폐증과 싸워야 한다. 정부의 무관심 역시 그들을 서럽게 만든다.

▲코카잎은 파는 상인들 / 사진=유용준 기자
▲코카잎은 파는 상인들 / 사진=유용준 기자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마저 광부들의 권익에는 무관심 하다고 그들은 토로한다. 1825년에 볼리비아가 독립을 쟁취한 후 이 광산은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협동조합 소유가 됐다. 하지만 광부들의 고단한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목숨을 담보로 일해야 하는 원시적인 작업 환경도 달라지지 않았다.

▲은광에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은광에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해마다 사고가 끊이지 않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다 앞으로 100년은 더 채굴이 가능하다는 세로 리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걸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떨려온다.빈약한 선물을 들고 와 그들의 삶을 엿보는 미안함을 토로하니 가이드는 이렇게 답했다. "이곳 광부들은 관광객을 환영해요. 이 깊은 곳까지 그들을 찾아와 주는 유일한 사람들 이니까요" 광산 투어 자체가 25년 전 광부들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광산들어가기전 사진=유용준 기자
▲광산들어가기전 사진=유용준 기자

갱도 안에서 일 하는 그들에게는 정말 관광객도 반가운 존재인 걸까. 비좁은 갱도에서 우리들과 마주칠 때면 검은 얼굴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광부들. 이 도시에 사는 20만 명 중에 이제 광부는 12,000명에 불과하다.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광산투어는 40도 가까운 갱도에서 머물다가 얼음이 언 영하의 갱도를 거쳐 끝이 났다. 1651년에 만들어졌다는 터널을 걸어 광산을 빠져나왔다. 10층까지 있다는 갱도에서 겨우 5번째 갱도까지 내려갔을 뿐인데, 나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뚸고 숨이차고 머리가 아픈데, 매일을, 몇 년을, 몇 십 년을 아침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웠다. 암흑의 먼지구멍 속에서 일하는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코카 잎과 음료수를 건네며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수가 없다.

▲광사 은광 사진=유용준 기자
▲광사 은광 사진=유용준 기자

광산에서 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렀다. 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코카 잎을 씹으며 지나가는 남자들 사이를 걸어 포토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종탑에 오르니 눈앞에 세로 리코가 서 있다.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그리고 골목마다 우뚝 솟은 교회의 종탑들이 보였다. 종탑 사이로 포토시 건물들과 포토시 사람들이 정겹다.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의 광산 탐험은 내가 경험한 모든 탐험 중에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아픈 탐험이었다. 화려하게 꽃 핀 유럽의 문화는 결국 이들의 땀과 눈물, 목숨을 담보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된 강제 노동과 폭발사고, 수은 중독으로 수십만 명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의 땅.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광부들/ 사진=유용준 기자

그것도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3만 명의 흑인들이 조폐국에서 인간 노새로 일을 해야 했던 곳. 포토시는 슬프고 아픈 기억을 간직한 도시였다.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포토시/ 사진=유용준 기자

매일 매일을 죽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며 목숨을 지켜가는 강인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포토시 내 기억속에 아주 오래동안 기억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픈이 아름답게 보상받는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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