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는 살 수 없다” 기후정의행진··· 400여개 단체, 3만5000여명 시민 동참
노동자·농민·여성·청소년 한목소리 “화석연료 체제 종식, 정의로운 전환 시급”

푸른꿈고등학교 2학년 이서은 학생 /사진=박선영 기자
전북 무주군 푸른꿈고등학교 2학년 이서은 학생 /사진=박선영 기자

[서울시청=환경일보] 박선영 기자 = 서울 시청역 8번출구 앞, 오후 2시 무렵부터 골판지를 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골판지에는 다양한 구호가 적혀있었다. 자원을 들여 새로 제작한 현수막 대신, 버려지는 골판지를 재활용한 ‘친환경 피켓’이다. 집회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시청역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초면인 이들끼리도 거리낌 없이 기후위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눴다. 

토요일 낮 2시경, 약 400개의 단체와 총 3만5000여 명의 사람들이 시청역 부근에 모였다. 환경보호를 비롯해 동물권, 장애인권, 노동자인권, 양성평등, 빈곤철폐 및 주거복지, 농업농민 등 다양한 분야와 목적을 지닌 단체 활동가들이 본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눈 주제는 ‘기후위기’였다.

9월 22일 3시부터 시작된 기후정의행동 본집회에는 약 400개 단체 3만5000명의 시민이 모였다. /사진=박선영 기자
9월 22일 3시부터 시작된 기후정의행동 본집회에는 약 400개 단체 3만5000명의 시민이 모였다. /사진=박선영 기자

“나와 내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올해 3월 경북 울진에서 산불을 겪은 청년, 전남에서 혹독한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목격한 고등학생, 8월 집중호우에 잠긴 반지하에서 간신히 탈출했다는 40대 여성까지. 겪은 장소와 재난의 형태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결론은 하나, ‘이대로는 살 수 없다’였다. 피켓의 문구는 달라도 방향은 하나, ‘기후위기를 방치하면 살 수 없다’는 호소 일색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발생 전인 2019년 9월,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첫 번째 기후위기행진에 참여했다는 의정부 YWCA 회원인 박성희씨는 “그때와는 또 다르다”며 현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3월 울진·강원 대형 산불, 8월 서울과 부산 도심에 쏟아진 폭우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기후위기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누구에게 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나와 내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고 전했다.

집회에 참가한 의정부 YWCA 회원들 /사진=박선영 기자
집회에 참가한 의정부 YWCA 회원들 /사진=박선영 기자

전국 51개 단체, 3만 회원이 활동 중인 서울환경연합 이동이 사무처장은 “팬데믹 사태로 집회가 불가했던 지난 3년은, 전대미문의 감염병을 발생시킨 근본원인이 기후위기임을 통감한 세월이다. 올해 발생한 산불, 집중호우와 함께 집회에 수만 명이 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 무주군 푸른꿈고등학교 2학년 이서은 학생은 환경 전공자인 선생님의 지도로 ‘환경’을 정규과목으로 듣고 환경관련 다큐를 접했다. 그러면서 기후위기에 스스로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교내 환경 동아리에서 직접 친환경 샴푸와 린스를 만든다는 이서은 학생은 “초대형 산불과 대도시가 홍수를 겪는 모습을 보고 집회에 꼭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집회에 참가한 유재경 기후위기 활동가(오른쪽) /사진=박선영 기자
집회에 참가한 유재경 기후위기 활동가(오른쪽) /사진=박선영 기자

마포구 성산동에 사는 유재경 기후위기 활동가는 “집중호우 때마다 빈곤지역에서 피해를 입지만 대책은 너무나 미약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유 활동가는 “기후위기 피해 대책을 마련하는 마을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소비자의 행동을 촉구하는 소비자기후행동 석경미 공동대표는 “정부는 미세플라스틱 저감정책을 즉각 시행하라”는 구호를 회원들과 함께 외쳤다.

국내에서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가 열린 것은 2019년 종로구 대학로 이후 두 번째다. /사진=박선영 기자
국내에서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가 열린 것은 2019년 종로구 대학로 이후 두 번째다. /사진=박선영 기자

“3년 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 비상선언 필요”

국내에서 이 같은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가 열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2019년 9월 종로구 대학로에서 그린피스를 포함한 300여 개 단체와 약 5000명의 시민이 ‘기후정의행동’ 집회를 개최했다.

2019년 집회에서 정부를 향한 요구사항은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비상선언을 실시할 것 ▷온실가스 배출제로 계획과 기후정의에 입각한 대응방안을 마련할 것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독립적인 범국가기구를 구성할 것 등 3가지다.

3년 만에 집회를 주최한 ‘9월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 김건우씨는 “2019년 집회보다 시민들이 지적하는 기후위기 대응 문제가 다양해졌다. 또한 노동자, 농민의 기후위기 체감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결국 화석연료 체제의 종식과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등 제도 개선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집회에 개인으로 참가해 기후위기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는 시민들 /사진=박선영 기자
집회에 개인으로 참가해 기후위기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는 시민들 /사진=박선영 기자

기후정의행동 조직위는 이날 선언문에서 “우리의 삶터는 어느 때보다 참담한 재난 속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국 각지 대형 산불로 수많은 생명이 소실되고, ‘반지하’로 상징되는 불평등 공간에서 동료,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기후재난 앞에서 가장 먼저 위기에 노출될 빈민, 여성,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노인, 성소수자 등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화석연료 사용 및 생명 파괴 체제, 사회적 불평등을 끝내고 기후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기후 정의’를 주제로 집회를 기획한 기후정의행동 조직위는 “기후정의는 녹색성장과 탄소중립을 빌미삼아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고 노동자가 일터에서 쫓겨나는 현실에 맞서는 싸움이다. 기후정의행동 집회는 기후위기 시대,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후정의행진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기후위기 시대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누리는 '기후정의'를 호소했다. 
기후정의행진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기후위기 시대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누리는 '기후정의'를 호소했다. 

“기후위기, 결국은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

자유발언 시간에는 청소년, 노동자, 농민, 석탄발전소 소재 지역 주민 등 기후위기 최전선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들이 마이크를 잡고 기후재난의 경험과 기후정의의 지향을 나눴다.

청소년과 청년을 대표한 김보림씨는 “막대한 탄소 배출로 착취와 불평등을 강화해온 시스템으로부터, 그 시스템이 낳은 위기로부터 개개인의 삶을 지키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어 “기후위기는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임을 모두가 인지해야 한다.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개개인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후위기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를 대표해 발언에 나선 박종현씨는 “모두 탄소중립을 외치지만 화력발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며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로의 정의로운 전환을 촉구했다.

빈곤사회연대 이재임씨는 “빈곤의 뿌리와 기후위기의 뿌리는 이어져 있다”며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후정의 사회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확대와 세입자 권리 강화, 재개발 재건축 규제 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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