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왕의 후궁이 된 벽화…지대로의 첩자 노릇, 법흥왕의 후궁

▲ 영주 순흥면에 있는 벽화고분. 신라시대 479년 또는 539년(소지왕이나 법흥왕 때)에 조성된 고분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로 확인되어 원형을 유지한 채로 복원했다.
▲ 영주 순흥면에 있는 벽화고분. 신라시대 479년 또는 539년(소지왕이나 법흥왕 때)에 조성된 고분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로 확인되어 원형을 유지한 채로 복원했다.


신라가 국가의 형태로 구성되던 시기에는 지금의 경주시 행정구역 정도의 틀에서 여러 부족이 마을 단위로 집단생활을 하면서 연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신라 수도인 서라벌의 주변에는 영천, 청도, 경산 등지에서도 부족들이 국가 형태로 모여 살면서 때로는 전쟁을 하고, 때로는 연합하면서 발전해 왔다. 소지왕 때에는 신라의 영토가 상당히 늘어나 고구려 영토였던 날이군까지 다스려야 했다.



벽화는 날이군의 군주 파로의 딸이었다. 파로군주는 16살의 꽃 보다 예쁜 딸인 벽화를 날이군으로 행차한 소지왕에게 선물로 바쳤다. 이때부터 벽화의 기구한 운명은 시작됐다. 신라의 정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 영주 순흥벽화고분으로 가는 길.
▲ 영주 순흥벽화고분으로 가는 길.




◆소지왕과 지대로, 그리고 파로군주

신라, 백제, 고구려와 접경지역으로 군사적 충돌이 잦았던 날이군지역은 고구려의 땅이었으나 파사왕 이후 신라로 편입돼 신라가 다스렸다.



당시 날이군의 인구밀집도가 높아 상당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군주가 바뀌면 군주의 성향에 따라 도시의 성격도 바꼈다. 신라사람들이 고구려 또는 백제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혼합된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소지왕이 즉위할 당시의 날이군주는 파로였다. 파로는 매우 활동적인 전술가이자 타고난 무인이면서 야망이 큰 전략가였다.



파로군주는 이미 청년기에 신라는 물론 백제, 고구려지역의 장군들과도 비공식적으로 인연을 맺고 교류하며 지리적 상황까지 곳곳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파로는 수도 서라벌과 연접해 있는 흥해지역의 지대로와는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을 두텁게 쌓고 있었다.





▲ 순흥벽화고분을 복원한 모형 고분.
▲ 순흥벽화고분을 복원한 모형 고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해 빼앗고, 연이어 날이군과 강릉 등을 공격해 왔다. 고구려가 날이군을 공격해 왔을 때 지대로는 날랜 병사 50명을 차출해 날이군의 최전방에 나서 적군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지켰다.



이러한 지대로의 위험을 무릅쓴 도움에 감격한 파로는 여동생을 지대로의 아내로 보내 혼인으로 더욱 깊게 인연을 맺었다.



또 장수왕이 군사들을 우회해 강릉과 삼척에 이어 울진, 영덕을 격파하고 흥해까지 내달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고구려는 서라벌 목전까지 진출했다. 신라는 다급해졌다.



이때 파로는 1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흥해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막역한 친구 지대로를 지켜주기 위한 우정의 출병이었다. 파로의 출병은 시기적으로 적절했다. 장수왕의 우장이 지대로와 맞붙었다. 고구려군은 승리의 기세로 사기가 충천해 신라병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천하의 명장으로 전해지던 지대로도 고구려 군사들에 둘러싸여 허덕이고 있을 때 파로의 병사들이 벼락같이 달려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고구려군의 후미를 휘저으면서 지대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지대로와 파로의 우정은 흥해전투를 계기로 더욱 깊어졌다. 흉허물없이 모든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사이로 발전해 지대로의 왕좌를 향한 꿈에도 함께 하게 됐다.



▲ 순흥 벽화고분 입구에 그려진 채색된 벽화.
▲ 순흥 벽화고분 입구에 그려진 채색된 벽화.




◆벽화의 사랑과 꿈

벽화의 미모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났다. 날이군은 물론 인근 지역의 내노라하는 집안의 청년들이 미리 눈에 들기 위해 군주의 집 주변을 맴돌았다.



벽화는 철저한 아버지의 관리 덕분에 어떠한 남자와도 연민의 정을 나누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소지왕이 두 번째 날이군 순시를 왔을 때 파로는 큰 잔치를 열어 소지왕을 집안으로 초대했다. 그리고는 딸 벽화를 소지왕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



소지왕은 벽화를 보고는 첫눈에 넋을 잃어버렸다. 벽화 또한 단아하면서도 곱상하게 생긴 위엄이 서린 소지왕의 남성다운 풍모에 홀딱 반해버렸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1천 년을 기다려온 듯 사랑에 몰입하게 됐다.



소지왕은 벽화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국정이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나깨나 오로지 벽화 생각뿐이었다. 소지왕은 날마다 밤을 틈타 날이군으로 달려 벽화를 만났다. 벽화도 집안에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어 어둠이 짙도록 집 앞의 언덕에 올라 서라벌 쪽으로 눈을 두고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 순흥벽화고분의 뚜껑돌.
▲ 순흥벽화고분의 뚜껑돌.


파로는 지대로와 머리를 맞대고 벽화를 궁으로 들여보낼 전략을 짜고, 이어 궁내의 사정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첩자를 심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파로와 지대로의 뜻대로 소지왕은 벽화를 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벽화는 꿈 같은 사랑에 취하기도 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해야 하는 정보원 교육을 귀가 닳도록 받았다.



그리고 벽화는 조심스럽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왕의 아들을 낳아 나라의 어머니가 되리라.’

벽화의 꿈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소지왕의 벽화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드디어 벽화는 호랑이가 지붕으로 뛰어내리는 꿈을 꾸면서 아기를 가졌다.





▲ 신라 날이군(현재 영주)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리던 장소라고 전하는 동구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고택.
▲ 신라 날이군(현재 영주)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리던 장소라고 전하는 동구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고택.




◆벽화의 운명

벽화는 아버지 파로와 지대로에게 단단히 약조를 받아냈다. 궁내의 소식들, 특히 소지왕 주변 귀족들의 이야기에 대해 매일 드나드는 시종을 통해 아버지와 지대로에게 전해주는 대신 나중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과 아들에 대한 안전을 철저하게 지켜줄 것을 약속하게 했다.



벽화가 후궁으로 들어왔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지왕을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왕이 후궁의 침실을 찾는 일조차 일일이 어전회의를 거쳐 결정하게 했다. 소지왕이 그나마 회의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침실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벽화를 찾는 횟수는 다른 후궁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사실 소지왕은 벽화의 침실을 하루에 한 번씩 핑계를 삼아서 꼭 찾았다.



벽화는 소지왕이 찾아오면 요리든 간식거리든 약주든 먹을 것을 내어놓고 친밀감을 갖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물론 침실에서도 벽화는 정치적 이야기를 나누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이들의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었다. 소지왕도 벽화에게 나라의 일이든 대신들의 업무 처리 습관이든 미주알고주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리던 동구대지역에 조성된 구학공원.
▲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리던 동구대지역에 조성된 구학공원.


그러나 벽화는 내심 자신의 태어날 아들을 위해 소지왕이 굳건히 왕좌를 지켜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벽화의 바람은 그냥 허무한 바람에 그쳐야 했다.



벽화는 아버지 파로를 닮아 똑똑했다. 무엇을 해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생각에 생각을 더해 철저한 계산 아래 말하고 행동했다. 특히 그의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는 이중삼중의 안전조치를 취했다.



벽화는 침실에서 소지왕의 안전에 대해 크게 근심하는 소리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러자 소지왕은 자신을 아무도 모르게 지키는 그림자 호위무사 두명을 뒀다. 그들은 소지왕을 철저하게 보살폈다. 왕의 호위무사는 지대로에게서 훈련을 받은 지대로의 심복이자 첩자였다.



소지왕은 벽화의 신변을 염려해 자신의 호위무사 중 하나는 벽화를 돌보도록 했다. 벽화가 의도한 대로다. 나중에 벽화의 호위무사는 벽화가 낳은 아이를 지켜주는 호위무사가 될 것이다. 벽화는 거기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영민한 스승을 찾아내어 지대로의 집에서 만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렸던 구학대가 갈라진 서구대 등산로.
▲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렸던 구학대가 갈라진 서구대 등산로.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을 맞아 신궁을 찾아 기도를 올리는 제를 지냈다. 신궁 행차에는 많은 제관과 군사가 줄을 지어 행진했는데, 백성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며 구경했다.



가장 민첩하게 움직이는 팀은 선혜왕비 측의 군사들이었다. 왕이 신궁에서 돌아오는 지친 시간을 틈타 공격하기로 하고 월정교와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병사들을 숨겨뒀다.



지대로와 파로군주는 이미 모든 계획들을 미리 파악하고, 2차 및 3차 반란 제압과 후속조치를 위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대로와 파로군주도 신궁의 제사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소지왕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경계하고 있었다.



선혜왕비 측의 군사들이 취해서 돌아오는 소지왕을 월정교에서 공격하기 시작하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던 왕의 수비대들도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활과 불화살까지 준비하고 반란군들을 향해 무기들을 날렸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끝내 백병전이 벌어져 두 세력의 군사들은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조차 분별이 잘 안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이들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고, 누더기가 되어가는 상황에 파로와 지대로의 군사들이 함성과 함께 물밀듯이 다가와 두 세력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리고 수순에 따라 지대로는 지증왕에 즉위했다. 파로는 날이군주이자 병권을 담당하는 대신이 돼 서라벌궁궐을 수시로 드나드는 실세가 됐다.

또 벽화는 궁궐에서 아들을 키우며 지대로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이가 글을 배우고 무예를 익힐 시기에 지대로는 벽화를 아들과 혼인하게 했다. 물론 지대로의 아들 원종은 부인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선녀같은 벽화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지증왕의 아들 원종은 나중에 법흥왕으로 즉위해 벽화를 끔찍이 사랑하는 후궁으로 명했다. 그러나 벽화는 타고난 미색 때문에 궁중 내외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루지는 못했다. 벽화는 자신과 아들이 생명을 부지하며 건강하고, 아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은 대신으로 성장해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만족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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